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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ilanfoe 2024. 2. 7. 16:17


남의 사생활 캐고 들여다보는 걸 싫어하는데 이 책의 내용은그걸 자세히 살펴보고 내 관점을 잡기 전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태도였다가 저 태도였다가 여러 날을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 중인 채 이 리뷰를 쓴다. 얘기를 진행하면 뻔히 알 테지만 사건의 중심인 L 작가는 이니셜로 진행하겠다. #오타쿠_내 성폭력 해시태그로 촉발된 L 작가 사건 이후 이 책은 2016년 10월부터 2017년 5월까지 그 문제를 토론한 모임에서 나왔다. 9 패널의 글이 실려 있고 L 작가도 모임에 동참했으나 그 목소리는 담겨 있지 않다. 이 책에서 가장 불만스러운건 패널의 상당수가객관성, 윤리성, 중립성을 내세우면서 이 폭로전의 진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멀찍이 떨어진 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 공방 중인 사건이라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이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방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네티즌’의 잘못됨과 한계를 문제의 핵심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신들의 프레임과 태도가역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한다는 진보적·페미니즘적 계몽주의로 비칠 거라는 건모르시는지.L 작가가 자초한 자가당착처럼. 문제의 발단을 깊게 짚어보지 않고 방향을 제대로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순진한 것 아닌가. 적어도 이 사건에서는단순한 도덕 윤리론에 기인한 무지한 집단 폭력이라는 초점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피해자 A의 고발을 철석같이 믿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2차 가해가 될지 모르는 L 작가의 만화를 거부하는 거라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는 이분법적 구도라고 생각하는 게 이분법적이다. 여러 논의를 거칠 시간이나 기회도 없이 빠르게 진행된 이유는 뭘까. 사람은 단순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심리를 건드리는 요인들은 아주 복잡하고 파급력이 크다. L 작가의 만화가 여성 혐오의 문제, 약자의 울분, 외톨이의 욕망 등을 대변해주는 문제적 작품이었다고 해도 그를 폐기처분하려는 이 움직임의 구심력은 L 작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L 작가는 2016년 10월 19일 1차 입장문에서 “저는 평생 아무에게도 성적인 관심을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창작의 기본적인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관심을 못 받았을 뿐 아니라, 제가 친구가 없다는 것까지도 저의 창작자적 캐릭터에 포함됩니다. 저는 친구가 없고 성적인 관심을 못 받는 자신을 혐오했으며, 저와 달리 성적 관심을 즐길 수 있는 다른 여성들을 혐오”했다고 밝히고서 10월 21일 2차 입장문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제 개인의 욕망과 배설을 투사하기 위한 얄팍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은 억울한 판단”이며, “저는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 창작자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에서 예술이 가질 수 있는 자유만이 접근/성취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동시에 일반 시민으로서의 윤리의식과 인간성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자기기만을 보여줬다. 「오해의 세계」에서 이나라는 L 작가와 작품의 별개성을 부정한다. 이나라는 L 작가와 ‘미지’의 관계를 플로베르와 ‘엠마’처럼 별개로 볼 수 없으며 버지니아 울프와 ‘로우다’(《파도》)처럼 닮았다고 말한다. L 작가가 트위터 상에서끊임없이 보인 극악한 패드립과 작품 속에서 남성을 강간하는 미러링 등은 자신을 전혀 변호해 줄 수도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도 없게 한다. 글을 위한 글 같은이론을 끌어온 글보다 L 작가의 작품 분석으로 해명하려한 이춘식의「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이 가장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춘식은 L 작가가 피해자 A의 성폭행 사주·방조한 일을 희화한 작품으로 논란되고 있는「포도주와 포타주의 식사」, 「아이들」을 다른 시기의 작품과 비교해 사건과 관련 없음을 증명해 보이려 하지만 작가를 지지하는 방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사건과 연관성이 짙은 「포도주와 포타주의 식사」는 A의 사건이 일어난 즈음에 그려졌다는 게 더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L 작가가 A가 강간 당한 것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A-B의 섹스 상황을 알고 있었고 조롱과 복수의 의도인지는 본인만 알겠지만정황과 1%의 연관성도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의 추정이답정너 빙의 상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사람들의 분노는 터부를 다루는 창작의 자유를 간과해서가 아니다.L 작가가 현실을 비틀어 가져오는 방식,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그가 내세운 "일반 시민으로서의 윤리의식과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항변을 무색하게 만들며, 이 사건처럼 문제로까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품을 혼동하지 말라고 지적하기엔 그가 내보인 게 너무 많다. 「이 여자들을 보라」에서 양효실은 비르지니 데팡트의 강간 이론을 가져와 “강간을 무릅쓸 권리”를 마치 피해자 A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고 있는데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글이다. L 작가를 내치는 것은 문화계의 자본주의적 계산법이라고말하는(p25)것도단순한 독법 아닌지.나도 한국의 윤리의식, 도덕적 가치관에 답답함을 느끼지만 이 사건에서 L 작가의 창작 문을 닫은 건 고발자 A나 계약을 거부한 업체나 페미니즘의 숙청, 여론이 아니라 작품 안팎에서 그가 행한 위악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건 B였지만 이처럼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게 만든 건 L자신임을이 책에서 왜 한 사람도 짚고 있지 않은가. 그 또한피해자 L 중심주의 아닌가. 지금 결과로써는 가련하고 딱한 예술가 L이 되고 있지만 그 많은 과정 속에 자신을 무너뜨릴 탑을 쌓고 있었다. 그래, 사람들은 내게 늘 이랬지… 하며 피해 의식을 키우고체념을 (L 작가가 자신의 성격으로몇 번을 강조하기도 한) 수동적 공격성 이라고 치장하고 외부에 무기로 휘두르면서그리고(drawing) 더더 그랬지. 자신이 뭘 그리고 있는지 정말 몰랐나. 예술이니 창작이니 자유니 하면서 뒤에 숨지 말라고!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참을 수 없었다. 문제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L 작가가 성폭행을 사주하고 방조했다기보다 사랑받지 못한 20대의 치기와무신경함이 사건 발생으로 인해 칼날을 맞은 걸로 보인다. 작품 속에는 자신을 구해 달라고 관심을 가져 달라고 절규하는 캐릭터로 가득한데 현실 속에서 당신은 타인에게 얼마나 그런 노력을 했나. 이 사건에서 가장 유명인이라 L 작가가 큰 타격을 입은 건 안타깝다. 어떻게든 화를 피하고픈 심정은 알겠지만 작품과 작가의 연관성은 피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연이더라도 억울하더라도 작품의 책임까지 작가의 몫이다(이 말, 나도 잘 새겨 들어야지). 사람들의 통념과 가치관을 통렬히 비웃으면서 그들의 인정을 바라며 그림 그릴 자릴 구걸하지마시길 바란다. 당신이 바란 예술이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면. 당신의 작품을 이용하고 죽인 당신이 당신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 넣으시라(이건 응원의 뜻이다). 화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성년자와 관련해여러 가지 혐의가명백히 의심스러운B는 어디로 간 건지 사람들이 자수하라고 아직도 성토 중이다. 당시 성폭행을 인지하지 못했다던 A는 2013년 당시 연애처럼 보이는 블로그 글을 썼다. 인지부조화처럼 혼란한 상태를 감안하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B에게 어떤 동정도 가지 않는다. 미숙했던 이상의 고통을 받는 이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바란다. A-B-L 작가, 이 책의 필진, 바깥의 우리 모두 각자의 도덕관념과 가치관으로 자기가 말하고 싶은 바만 말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내러티브에 따라 다른 경험으로 인식”한다는 철학자 이언 해킹(「도덕적 폭력」, 허성원)의 분석처럼. 이 사건에서 객관적이고 적확한 제삼자의 시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처방으로부르짖는 법 또한 최소한의 처리일 뿐 해결일 수 없다. 그래서 해시태그 성토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폐해를 인지하더라도 1%의 진실을 살리기 위해. 그것이 사회적 사형이 될지 활인(活人)이 될지 확률의 문제일 뿐일까. 우리가 집단지성의 역할인지 집단폭력의 역할인지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말의 위력을 인식하고 이렇듯 겪고 있지만 현실을 제대로 바꿀 수 있는 말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피해자냐 가해자냐 하는 물음이,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 질문이
감추고 잊히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이자혜라는 사건’과 ‘속도의 페미니즘’에 대해 온 힘으로 성찰한 기록들

#OO계_내_성폭력. 2016년 10월, 이 짧은 해시태그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오타쿠’라 불리는 하위문화에서 시작된 해시태그는 한국 문단과 미술계, 영화계와 공연계 등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널리 퍼졌다. 특히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 성폭력 경험을 공유하고 가해자를 고발했으며,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이를 ‘리트윗’과 ‘공유’를 통해 퍼뜨리면서 주요 언론까지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가해자로 고발된 이들의 사과가 잇따랐고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성폭력 해시태그는 온라인상의 단순한 기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위력을 보여 주었다.

여성의 강력한 연대를 보여준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의 여파는 국회토론회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로 확장되었다. 문단 내 성폭력 생존자들의 연대를 기록하고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설된 출간 프로젝트에는 6천 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모였다. 올해 들어서는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된 문인들의 구속 소식도 들려 왔다. 이렇게 해시태그 운동은 큰 성과를 올렸지만, 그만큼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그 한가운데에는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어디까지가 2차 가해이고 무엇이 피해자 중심주의인지, 피해자 중심주의는 정말 피해자를 보호하는지 등의 논의가 부재한 채, 누군가 SNS에 그것은 2차 가해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 발언이다 라고 규정하는 순간 어떤 말이든 자동적으로 2차 가해로 낙인찍히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구도 안에서는 오로지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있으며, 각 사안들의 복잡한 결은 쉽게 잊히거나 지워지고 만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필요한 논의는 하지 못한 채 서둘러 가해자를 삭제하는 것에 머물러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은 해시태그 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던 한 사건을 중심으로 피해자 vs. 가해자 구도가 삭제하고 폐기해버린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성찰하고자 한다. 미학자 양효실과 미디어 문화 연구자 이나라 등 스스로 여성이고 퀴어임을 공표한 아홉 필자들은 오랜 토론과 고민 끝에 힘들여 글을 썼다. 가해자를 신속하게 제거해야 피해자를 도울 수 있다는 믿음이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럼으로써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계속 그 위치에 고정시켜버리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여러 고민을 담은 이 기록은 페미니즘을 다시 사유하고 보다 폭넓은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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