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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 김승옥 소설전집 3

ilanfoe 2024. 2. 7. 08:32


어느덧 산수(傘壽)의 노인이 되었지만 김승옥 하면 개구져 보이는 젊은 시절의 얼굴과 그 젊은이가 자못 진지하고 쓸쓸하게 써 내려갔을 아름답고 세련된 문장들이 떠오른다. 내게 그는 여전히 만 마흔이 되지 않은 청년처럼 느껴지는데, 마치 그가 절필한 시점부터 어딘가에서 냉동되어 여전히 젊은이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에게서 발견하는 청춘의 우울과 비극과 허무는 참으로 달콤한 괴로움이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문장이 어쩐지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구원의 희망은 희미하기만 하고 그러나 그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타락을 택하지도 못하는 나의 삶을 묘사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던 창수나 자살을 계획하던 도인 둘 다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도인은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이 <정열>이라 한다. 솔직히 말하건대 나에게 정열이란 늘 우습고 한심스러운 것이었는데 말이다.삶에의 의지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 오늘 지인과 이야기를 하는데 사는 데 이유가 어디 있냐며, 태어났고 죽지 못하니 살 뿐이라고 했다. 비관적인 어조로 한 말은 아니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늘 삶에 큰 미련이 없다고 믿었다. 삶에 미련을 가지기엔 너무 대충 살았고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책임감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내일 죽는다는 상상을 해 보았더니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인지,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의 반작용인지, 아니면 진짜 삶에 어떤 의욕이라도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이러한 고민과 혼란의 시간도 영혼을 부려 먹는 일의 한 방편이고, 그리하여 어떤 양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위안 삼을 뿐이다.청춘의 여름이란 불안하고 낭만적이다. 에너지는 넘치는 데 반해 세상은 모순투성이인 한편정신은 연약하고 허무해서 차라리 무기력과 도피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당연하다 단언할수도 없고 영 볼썽사나운 것이 사실이지만 창수와 도인은 어쩐지 사랑스럽고 종국에는 다시 삶을 마주하려는 그들의 태도가 반갑기 그지 없었다. 훔친 것이 여자였든 무전여행이었든 신분이었든 그렇게 해서라도 창수는 여름을 이어갔다. 나의 이 우중충한여름도 욕심낼 만한 계절이었으면 좋으련만!2019년 7월
전후문학의 기적 살아 있는 신화 현대문학의 고전 단편미학의 전범 등 항상 화려한 수식어를 동반하고 이야기되는 작가, 독자들뿐 아니라 후배 작가들에게도 늘 선망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는 작가 김승옥의 소설전집이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인다. 전쟁이 드리운 음울한 그늘이 가시지 않았던 60년대 초반 한국문단에 이른바 감수성의 혁명 을 몰고 온 작가, 산문언어의 연금술사 란 호칭을 들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붓을 꺾고 독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작가 김승옥. 최근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의 전설적인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전집은 우리 문학의 완결된 한 시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또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진행형 의 소설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김승옥 소설전집 제3권에는 내가 훔친 여름 과 60년대식 , 두 편의 장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는 1967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내가 훔친 여름 에 대해 국내 여행을 통해 각 지역의 역사적, 사회적, 도덕적 문제점을 훑어보겠다는 야심 찬 대작이었지만 여수 지방에서 여행이 끝나고 말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내가 훔친 여름
60년대식

내가 읽은 김승옥 - 무진에서 돌아오는 길 (이응준)
작가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