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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의 산수


아내는 음악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다. 난해해... 나는 아내에게 몸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정확히 증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인다. 심하지는 않지만 몸 전체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음악을 바꾸는 대신 음악이 플레이 되는 노트북을 들고 책의 방으로 몸을 옮긴다. 난해하지 않아... 진동의 근원을 알아챌 수 있을까, 양쪽 손을 쥐락펴락 한다. 깍지를 끼었다가 풀어낸다.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보여준다. “노래가 삼킨 바다 / 노래가 무너뜨린 하늘 /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새의 주둥이” <무릎이 꺾인 음악> 중 식은땀의 기척, 이 봄 흠뻑 뜨거워보지도 못했는데 왜... 머리의 바깥쪽과 안쪽 사이에 빈 공간이라도 생긴 것처럼 텅, 텅, 텅, 문 두드리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다. 내 목소리가 들려주는 내 노래의 소리 들은 지 오래인 관객석의 나는 환호하는 방법 잊은 지 오래인데, ‘이십 년 전쯤 죽은 내가’ 관객석에서 소리라도 치는 것 같다. 거기 텅 빈 무대를 향하여, 솟구치는 태양 같은 조명이라도 쏘아, 아무도 없는데... “이십 년 전쯤 죽은 내가 / 먼 곳에서 태양을 어루만지는 영상 // 하늘의 커튼이 불타올랐다 / 박멸당하는 개미 떼 / 죽었다 알려진 동생이 기타 줄에 칼을 문대어 소리를 냈다 / 잘게 다져진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몸에 박혔다 // 내가 살아 있다, 누가 쓰다 만 일기의 결구結句처럼” <머뭇거리는 기도> 중 딸깍, 라이터에 불 붙이는 소리에 저 멀리서 고양이 한 마리 슬금슬금 다가선다. 담뱃재 좋아하던 강아지 한 마리가 죽은 지 이십 년이 되었다. 무르팍 위의 고양이를 향하여 오래 전 강아지에 대해 기도한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기도는 허리로 두툼해지기도 하고, 발바닥 굳은살처럼 새겨지기도 하고, 그러모은 손아귀 안에서 숨을 참지 못해 비어져 나오기도 한다. “고요하다 / 물속의 사막이 몸에 고인다 // 내가 호수에 갔던 게 아니라 / 호수가 내 꿈에 찾아왔던가 // 깨어나 거울을 본다 / 눈 내리는 밤이다 // 인두겁을 쓴 용龍 한 마리 / 자신의 오랜 남자를 죽이고 있다 // 죽음이 오기 전에 미리 / 불을 깨물어 버리리, // 뇌까리면서” <물의 백일몽> 중 #2 진동이 스러지는 듯 하더니 열이 차오른다. 무언가가 몸 안의 무언가를 물컹 밟고 지나갔다. 터져버려 난삽해진 무언가가 박제된 거울 하나, 튼튼한 벽을 고르고 또 골라서 못을 박고, 기울어지지 않도록 오른쪽 왼쪽 번갈아 고개를 휘둘러 본 후 건다. 걸린 거울을 향하여 걸어가고 다시 물러서고, 걸어가고 다시 물러서고, 그대로 걸어 들어간다. 뒷면에 우로보로스가 새겨진 거울을 상상한다. “해가 비친다 / 해는 어둠의 가시 // 똑바로 바라본 네 얼굴이 아름답게 따가웠던 이율 알겠다 / 내 몸에 옮아온 가시들이 너의 부득이한 말이었단 걸 이제 알겠다” <가시> 중 내 몸의 주인은 너무 나, 여서 한숨 고되게 자고나면 모든 앓이들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삼켜버린 것들이 곧 나, 여서 꿈에서나마 산산이 부서진 몸을 마지막 한 조각까지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뱉어낼 것들도 곧 나, 여서 나는 여전히 나를 구해 달라 노래 부르고 기도할 것이다. 강정의 시가 가시처럼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여, 몸의 진동에도 금세 덜, 덜, 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목도하면서... 강정 / 백치의 산수 / 민음사 / 125쪽 / 2016 (2016)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시, 저마다의 강정으로 존재하는 시, 자유롭고 찬란한 한국어로 쓰인 에너지 그 자체인 시. 한국 문학에서 가장 ‘시인 같은 시인’으로 손꼽히는 강정의 여섯 번째 시집 백치의 산수 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귀신 (문학동네, 2014) 이후 2년 만이자 1996 출간한 첫 시집 처형극장 이후 20년 만의 작품. 2015년 ‘현대시작품상’ 수상작 중 1편인 「토끼 소년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40편을 담았다.



1부 백치의 산수


광부
사진사
웃는 거울
마임
잊힌 부계父系
토끼 소년의 노래
인어의 귀환
무릎이 꺾인 음악
머뭇거리는 기도
피아노의 피안
비탈의 새-동혁에게
녹슨 꽃
공기놀이
죽음의 외경畏敬, 혹은 외경外經
할 말 없이
그림공부
백치의 산수
화염무지개
달의 혈족


2부 흡혈 묘목

실패한 산책
평범한 전이轉移
가을 산파
침묵 사냥
수은의 새
물의 백일몽
정오의 지진
잃어버린 말
너를 사랑한 흡혈귀
가시
흡혈 묘목
맴도는 나무
사슴과 사자
예수의 뜰
바닷가 화가
게면조
첼로의 바다
꽃의 그림자
경부 회귀선
무조無調